《올드보이》: 복수의 서사에서 존재론의 미궁으로
1. 서사 구조와 문학적 전통
《올드보이》는 고전 비극의 문학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주인공 오대수는 운명적 고난을 겪는 비극적 인간으로, 그의 이야기는 ‘복수’라는 주제를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비극 서사의 계보를 잇는다.
특히 오대수가 자신의 과거 말 한마디로 인해 지옥에 떨어지고,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딸과 금단의 사랑을 하게 된다는 점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부모를 모르고 살인을 저지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이처럼 《올드보이》는 무지(ignorance)가 불러온 비극이라는 고전 서사적 전통을 변형하여 현대화했다.
또한 서사 진행 방식 자체가 ‘추리적 구조’를 따르며, 이는 근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이다. 관객은 오대수와 함께 단서를 좇으며 진실에 다가가고, 그 진실이 주는 도덕적 충격은 단순한 스릴을 넘어 **비극적 정화(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관객은 분노, 연민, 슬픔, 혼란을 거쳐 결국 침묵 속에 주인공을 응시하게 된다.
2. 니체, 라캉, 사르트르로 본 존재와 욕망
《올드보이》를 철학적으로 읽어내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이 숨어 있다.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철학적 주제는 기억과 주체성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존재론적 불안이다.
● 니체의 ‘영원회귀’와 복수의 무의미함
오대수의 복수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함에 다다른다. 그는 복수를 완수했지만, 자신의 삶은 파괴되고, 도리어 다시 망각을 선택한다. 이는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개념, 즉 인간이 고통과 죄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간다는 사상과 맞닿아 있다. 오대수는 과거를 지우고 싶지만, 죄와 고통은 기억과 함께 순환된다. 니체는 이런 삶을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말로 수용하라 했지만, 오대수는 사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존재를 부정당한 채 살아간다.
● 라캉의 욕망의 구조와 거울 단계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자신의 결핍을 무의식 속에서 대체하려 한다. 이우진의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오대수에게 자신의 상처를 복제시키고, 오대수의 욕망을 왜곡시키는 치밀한 욕망의 구조물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딸인 미도를 사랑하게 만들어, 자신의 상처를 ‘거울’처럼 반사시킨다. 여기서 오대수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가 붕괴된, 거울 속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는 주체가 된다. 그가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우려 하는 것은, 자신의 ‘실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인간은 본질이 규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선택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대수는 15년간 억울한 감금과 고통을 겪었지만, 사실 그의 인생을 무너뜨린 시작은 바로 무심한 말 한마디였다. 그는 무책임한 선택의 결과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그 죄를 짊어져야만 했다. 사르트르 식으로 보면, 오대수는 자유의 형벌을 감당하는 존재이다.
3. 윤리와 용서의 부재
《올드보이》는 묻는다. “인간은 과거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오대수는 기억을 잃고 싶어 하지만, 기억이 사라진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던졌던 질문과도 같다. 진정한 용서는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러나 올드보이의 세계는 용서 없는 세계, 신 없는 세계이다. 죄는 속죄되지 않고, 고통은 반복된다.
이러한 서사는 신의 개입이 없는, 철저히 세속적 비극으로 수렴된다. 이우진도, 오대수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들의 선택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지옥을 의미하며, 이는 단테의 신곡 속 “희망을 버려라”는 문구를 떠오르게 한다.
4. 결론 – 복수극을 가장한 존재의 질문
《올드보이》는 단순한 복수극으로 시작하지만, 끝에는 철학적 미궁으로 빠져든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죄는 무엇이며, 용서와 구원은 가능한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문학적으로는 고전 비극의 변용이고, 철학적으로는 인간 본성과 기억, 욕망, 자아에 대한 집요한 탐색이다. 영화가 던지는 충격은 단지 반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정면 직시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넘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영화사 속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심연’**을 시적으로, 철학적으로, 영화적으로 기록한 하나의 선언이었다.
이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담아낸, 예술성과 철학성을 모두 갖춘 걸작이다. 복수라는 테마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도덕, 기억과 죄, 자유의지와 운명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관객에게 깊은 사고를 유도한다.
박찬욱 감독은 감각적 미장센과 치밀한 플롯,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를 통해 영화적 완성도를 극대화했으며, 이를 통해 올드보이는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복수라는 장르적 틀을 뛰어넘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인간 본연의 질문을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