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제적정세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중심으로, 1909년 전후 만주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조선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의해 실질적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이었으며, 만주와 하얼빈을 둘러싸고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 러시아령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고, 하얼빈은 그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도 여러 열강의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상실했고, 그 자리를 일본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았고,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 조약은 국제사회의 묵인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를 일정 부분 용인한 상태였다. 일본은 이를 발판 삼아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화를 가속화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 속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가 부설한 중동철도의 요충지로, 유럽과 중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지였다. 일본은 하얼빈 일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에 러시아와 지속적인 충돌과 협상이 반복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바로 이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의 관할 구역 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의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으로, 조선 병합의 실질적 설계자였다. 그는 하얼빈에서 러시아 측 인사와 회담을 갖기 위해 방문 중이었고, 그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총격을 당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조선 민중의 항거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메시지였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정당한 독립운동가임을 주장했고, 이는 당시 중국, 러시아, 유럽 등지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얼빈 사건은 당시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이 조선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당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식민지 민중의 분노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사례로 평가된다.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고, 국제사회는 대부분 일본의 침략에 침묵하거나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의 선택은 외교적 수단이 막힌 상황에서의 극단적 저항이었다. 그는 재판에서 자국의 독립을 위한 정당한 전쟁 행위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국제법상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화 『하얼빈』이 그려내는 국제 정세는 단순히 일본과 조선 사이의 관계를 넘어, 동북아 전체의 힘의 균형과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 조선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상호 지배를 묵인했고, 영국 역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즉, 국제사회는 조선의 독립보다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결국 『하얼빈』은 안중근 개인의 영웅적 서사를 넘어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식민지 민중의 절박함과, 외면당한 정의의 외침을 조명하는 역사극이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한 개인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2.줄거리
영화 『하얼빈』은 1909년, 만주 하얼빈을 배경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국을 빼앗긴 채 떠도는 조선 청년 안중근은 일본의 조선 침탈에 분노하며 독립운동에 나선다. 그는 만주와 러시아 국경을 오가며 비밀결사와 뜻을 함께하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의 방문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목숨을 건 거사를 감행하며, 역사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영화는 단순한 암살극이 아니라, 안중근이 어떤 철학과 신념으로 행동했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그가 추구한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닌 조선의 자주독립과 동양 평화였다. 극 중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고뇌하며,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책임을 함께 짊어진다. 영화는 그의 내면과 현실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리며, 한 인물의 선택이 역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3. 안중근 평론
안중근(1879~1910)은 조선 말기 국권이 상실되는 혼란한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탈의 주범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이 아닌, 식민 지배에 저항한 민족의 목소리이자 국제 사회에 던진 강력한 선언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닌 철학과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었고,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실천가였다.
그의 사상은 당시의 무장투쟁가들과는 결이 다르다. 그는 무장 항쟁을 택했지만, 그 바탕에는 철저한 인간애와 동양 평화에 대한 깊은 신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사를 ‘전쟁 행위’로 규정하고, 국제법상 정당한 독립전쟁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유고인 『동양평화론』은 이러한 그의 철학을 집약한 저술로, 단순히 일본에 대한 분노를 넘어, 한국·중국·일본 3국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이상을 담고 있다. 이는 안중근이 민족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국제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은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불태운 도전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던 때였다. 국내에서의 저항은 철저히 억압되었고, 열강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암묵적으로 승인한 상태였다. 안중근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해외로 나가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고, 끝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의 행동은 목숨을 건 호소였고, 세계를 향한 조선인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그는 체포 이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며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의병장’으로 규정했다. 그는 재판 내내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가 국제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담대함과 철학적 언변은 일본인들마저 감탄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일본 검사조차 그를 존경한다고 기록에 남겼다. 그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그날 이후 영원히 역사에 새겨졌다.
안중근의 삶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단순한 민족 영웅을 넘어, 시대를 꿰뚫는 사상가로서 그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의 철학은 폭력이 아닌 정의로운 질서를 위한 투쟁이었으며, 억압받는 민족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늘날 한일 관계가 복잡한 감정과 역사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금, 안중근의 사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화해와 정의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안중근은 단지 총을 든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그는 교육자였고, 작가였으며, 사상가였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인간의 도리와 신의 뜻 사이에서 항상 균형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인 “대한독립 만세”는 단지 외침이 아니라, 한 인간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철학과 신념의 집약이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함으로써 단순한 과거의 영웅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책임을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