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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리적분석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 2017)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심리 스릴러 영화이다. 한때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주인공이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살인마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인간의 기억, 죄책감, 정체성, 그리고 도덕성의 경계를 심리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인공 ‘병수’는 한때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던 전직 연쇄살인범이다. 하지만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과거의 기억이 점점 소멸하고 현재와 과거를 혼동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병수는 이제 살인을 멈추고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딸과 함께 조용한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배경은 병수가 단순한 악인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게 하는 중요한 심리적 장치다. 관객은 병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죄의식과 도덕적 양심을 목격하게 된다.
병수의 심리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뉜다. 첫째는 기억의 혼란이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병수는 과거의 살인 기억과 현재의 일상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병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지속적인 의심과 혼란을 느낀다. ‘내가 또 살인을 저지른 걸까?’, ‘이건 과거의 기억인가, 현재의 상황인가?’라는 질문이 반복된다. 병수는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리며, 이는 극도의 불안감과 자기불신을 유발한다. 이는 실존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둘째는 도덕적 양심과 살인의 충동 사이의 갈등이다. 병수는 과거에는 ‘나쁜 놈만 죽였다’는 나름의 기준으로 살인을 정당화했지만, 이제는 그 기준조차 흐려져 있다. 그는 스스로를 ‘퇴직한 살인자’로 칭하며,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려 노력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억압된 욕망과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예다. 병수는 살인의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들 때마다 그것을 통제하려 애쓰며, 이 과정에서 정신적 고통이 극대화된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의 핵심 인물은 새로운 살인자로 등장하는 민태주(김남길)다. 태주는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공손한 경찰이지만, 실제로는 병수보다 더 냉혹하고 치밀한 연쇄살인범이다. 태주는 병수의 혼란을 이용해 자신을 숨기려 하며, 오히려 병수가 범죄자로 몰리게 만드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이때 병수는 다시금 자신 안의 살인 충동을 끌어올리게 되며, 심리적으로 퇴행하기 시작한다.
병수의 심리는 알츠하이머라는 질병 자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 속에서 병수는 중요한 단서나 진실을 기억에서 잃어버리고, 이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이는 ‘기억의 부재가 곧 진실의 부재’로 연결되며, 병수의 판단이 현실을 왜곡하게 만드는 심리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기억의 단절은 주체의 정체성을 해체시키며, 결국 병수는 살인자와 보호자, 죄인과 영웅이라는 이중적 자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게 된다.
병수의 심리 구조는 분열적인 자아에 가깝다. 그는 과거의 살인자 병수, 현재의 아버지 병수, 그리고 알츠하이머 환자 병수라는 복수의 자아를 품고 있으며, 이 자아들 간의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갈등과 폭력이 폭발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말하는 원초적 본능(id), 초자아(superego), 자아(ego) 사이의 긴장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살인의 충동은 원초적 본능이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초자아이며, 병수의 자아는 이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
흥미로운 점은 병수가 자신의 죄책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붙잡기 위해 메모와 녹음을 반복한다. 이는 심리적 방어기제로서의 ‘보상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행동을 통해 내면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태주의 정체를 알게 되자, 자신이 다시 ‘살인’을 택하더라도 그것이 이번엔 ‘옳은 일’이라고 믿고 실행에 나선다. 이 부분은 병수가 완전히 타락한 인물이 아니라, 비틀린 정의감과 도덕적 혼란 속에서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죄, 정체성에 대한 깊은 심리적 탐구로 읽힌다. 병수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이는 기억이 단순한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인간의 윤리와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묻는 작품의 핵심 질문이다.
2.민태주의 사이코패스 성향 분석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민태주는 외형적으로는 매력적이고 친절한 경찰로 등장하지만, 실상은 치밀하고 냉혹한 연쇄살인마다. 그는 주인공 병수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하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고 조작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과 행동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특징과 상당히 부합한다.
*표면적인 매력과 이중성
사이코패스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정상적이고 심지어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민태주는 경찰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바탕으로, 친절한 말투와 단정한 외모로 주변 인물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병수의 딸 은희에게 다가갈 때에도 위협적인 기색 없이, 연인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이며 신뢰를 얻는다. 이는 사이코패스들이 자주 사용하는 ‘사회적 위장(social mask)’과 동일하다. 자신의 본심을 철저히 숨기고 사회적으로 적응해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피해자나 주변인에게 경계심을 허물게 만든다.
*감정의 결여와 공감 능력 부족
민태주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공포를 즐기거나, 그것을 무시한다. 그는 병수 앞에서 “살인을 즐기는 건 병이 아니라 취향”이라고 말하며, 인간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사이코패스가 지닌 대표적 특성인 감정 결핍, 공감 능력 저하, 양심의 결여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희생자의 입장이 되어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살인을 도구처럼 사용한다.
*조작과 거짓말에 능함
태주는 병수와 은희에게 접근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위장한다. 병수가 자신을 의심할 조짐을 보일 때마다, 그는 교묘하게 정황을 조작하거나 거짓 증거를 만들어 병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기만적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타인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행동을 조절하는 높은 조작 능력을 지녔다.
*충동성과 자기중심성
사이코패스는 일반적으로 충동적이며 자신의 쾌락이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 태주는 자기 목적을 위해 은희에게 접근하고,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한다. 그는 범죄의 결과에 대해 장기적 책임을 고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상황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데 집중한다. 이처럼 즉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판단 구조 역시 사이코패스의 심리적 특징 중 하나다.
*도덕성 결여와 자기 합리화
태주는 범죄 행위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병수에게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냐”며 도덕적 가치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법의 집행자인 경찰이면서도, 법과 윤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자기 욕망을 우선시한다. 그는 살인을 ‘즐길 수 있는 권리’로 포장하며, 그것이 병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사이코패스가 보이는 도덕 불감증과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3.총평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을 잃어가는 한 노인의 시선을 통해 살인의 본성과 인간 내면의 모순을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로, 단순한 범죄 영화 이상의 깊이와 철학을 담고 있다. 원신연 감독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하며, 원작의 철학적 질문을 스릴러 장르 속에 효과적으로 녹여냈다. 무엇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전직 살인자의 시점을 통해 관객은 “기억이 없는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죄의식과 책임은 기억에 기반한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탄탄한 심리 묘사와 구조적 긴장감이다. 주인공 병수는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며, 과거의 살인 기억과 현재의 위협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선택을 이어간다. 이러한 심리적 혼란은 곧 관객의 혼란으로 이어지며, 영화는 진실과 거짓,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특히 병수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서사는 제한적 시점으로 인해 극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마지막까지 관객을 의심하게 만든다.
배우 설경구는 병수 역을 맡아 압도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의 복합적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한다. 그의 연기는 병수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죄책감과 혼란 속에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입체성을 부여한다. 상대역인 김남길 역시 이중적인 인물 태주를 냉소적이고 섬뜩하게 소화하며,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두 배우의 팽팽한 심리전은 영화의 핵심축을 형성하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살인자의 기억법》은 인상적이다. 어두운 톤의 영상과 클로즈업 촬영은 병수의 불안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음향과 음악은 장면마다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편집은 의도적으로 시간의 순서를 뒤틀고, 중첩된 기억의 장면을 반복함으로써 병수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를 묻는 추리물이 아니라, “누가 믿을 수 있는가”, “나조차 믿을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병수가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고, 주변 인물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이는 현대인의 불안한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기억과 윤리의 상관관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이어진다.
종합적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심리적 깊이와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갖춘 수작이다. 인간의 본성과 죄의식, 기억의 불완전성을 치밀하게 풀어낸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과도 같다. 흥미로운 플롯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감각적인 연출이 어우러져,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영화로 자리매김한다.